11일, 강의를 끝내고 봄나들이를 위해 조선시대 4대 궁궐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창경궁으로 향했다. 철쭉이 많은 창경궁은 뭐니 뭐니 해도 5월에 가야 제맛이지만, 5월 강의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으므로 시간이 날 때 가는 게 최고다. 여기저기 꽃이 조금씩 피어있어 화려하진 않아도 도심에서 조용하게 자연과 봄을 느낄 수 있는 봄나들이 장소로 궁궐만 한 곳이 없는 것 같다. 아마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인 내 취향 탓도 있겠지만, 고층 빌딩 사이에서 보는 꽃들보단 전통 건물을 배경으로 보는 꽃들이 더 예쁜 것 같은 느낌이다.
강의를 끝내고 곧장 종각역에서 버스를 타고 혜화에서 내렸으나, 길도 잘 모르고 방향감각은 애초에 없는 나는 역시나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사정없이 헤매기 시작했다. 다리는 아파지기 시작하고 배도 고프고 무작정 눈에 보이는 분식집으로 들어가 밥을 먹으며 분식집 사장님께 창경궁 위치에 대해 물어보았다. 생각지 않게 서울대병원을 가로질러 가라고 안내해 주신다. 가로질러 가지 않으면 뺑 돌아간다며 병원을 가로지르면 바로 나온다는 말씀에, 서울대 병원 건물 사이를 이리저리 가로질러 가려고 했으나, 어느 방향으로 틀던지 항상 막다른 곳에 도달했다. 결국 서울대 병원 안에서 엄청 헤매고 다니다 다리만 엄청 아픈 채로 다시 밖으로 나와 한 바퀴 뺑 돌았다.
한나절 봄나들이 즐기기에 좋은 창경궁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해 눈앞에 창경궁 홍화문이 보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입구에서 1,000원의 저렴한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봄철 현장학습을 나왔는지 여기저기 교복 입은 학생들이 여럿 보였다. 옥천교 주변의 벚꽃은 이미 다 졌지만 그래도 다른 봄꽃들은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모양이다. 나뭇가지엔 새로 돋아난 연둣빛 잎들이 보였다. 역시 봄이란 싱그럽다. 황사만 없어지면 정말 참 좋은 계절일 텐데 말이다.
궁궐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지체 높으신 여성분들의 거처가 나온다. 대비의 침전이라는 양화당(養和堂)과 중전의 침전이라는 경춘전(景春殿) 근처는 궁궐 내에서도 꽃이 제일 많다. 여성 여성한 지역인지라 바로 옆 층계식 화단에도 꽃이 한가득! 철쭉이 한창일 무렵 이곳에 오면 이 층계식 화단은 철쭉으로 가득 찬다. 화단 위 산책길은 사람들이 잘 올라가지 않는 곳이라 조용히 벤치에 앉아 멍 때리는 장소로는 과히 최고라 할 수 있다. 바람은 살랑살랑, 눈앞의 꽃잎도 살랑살랑,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경춘전 주변의 꽃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면 세상에 천국이 따로 없다.
한참 더 안쪽으로 들어가 춘당지를 지나면 국내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라는 대온실(大溫室)이 있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동물원과 함께 지은 건물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창경원 동물원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던 슬픈 역사를 지닌 궁궐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원래 종묘와 창경궁은 하나로 크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일제가 창경궁 일부를 밀어버리고 도로를 내버려서 지금은 이 두 곳이 완전 별개의 공간으로 분리되어 버렸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멀쩡한 궁궐이 순식간에 동물원으로 둔갑이 되기도 하고, 하나였던 것이 둘로 쪼개지기도 하니 정말 한 나라의 국력이란 매우 중요하지 않나 싶다.
조선시대 4대 궁궐 관련글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 서울 신용카드 인천 일본 일상 전라도 제주 충청도 캄보디아 코로나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