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광저우 전시회 일로 출장을 9일 동안이나 다녀왔다. 인생 첫 중국 방문은 정말 충격적인 경험의 연속이었기에, 누적된 정신적 피로를 풀기 위해 예쁜 풍경을 보러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에 다녀왔다. 날씨 더워지기 전에 여행도 이리저리 다녀야 하지만, 아직도 격주 주 5일제 근무를 하는 회사. 작년 7월부터 시행된 100인 이상 사업장 전면 주 5일제 근무에 무척이나 들떠 있었는데 여전히 격주 주 5일제라는 것이다! 아니 왜???
사실 작년에 부설연구소와 해외영업팀만 따로 분리해 사무실을 옮겼었다. 사무실 옮기느라 개 고생한 것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데, 알고 보니 전면 주 5일제 피해 가려는 꼼수로 인한 이사였다. 생산파트 및 국내영업과 법인을 분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류상 우리는 20명 미만이라 앞으로도 계속 쭈욱 이렇게 격주 주 5일제를 한단다… 내가 이 회사를 과연 얼마다 더 다닐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글의 목차
세계문화유산 관람도 식후경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 달리 도착하면 바로 표를 사서 입장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대기가 상당했고 가이드의 안내를 통해 그룹으로 관람하기 때문에 표를 살 때 예약 가능한 시간에 표를 산 후 대기를 하다 시간에 맞춰 입장해야 했다. 우리 모녀는 대략 1시간 반 정도 이후의 표를 예매한 후 그 사이에 근처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대기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점심시간에 맞춰 간 것 칭찬해!
점심을 해결한 만한 곳을 찾아 창덕궁 건너편 골목길로 향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테이블 3~4개가 전부인 소박한 규모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바지락칼국수 단일 메뉴 식당이라 고민 없이 바지락칼국수 2인분을 주문했다.
짧은 기다림이 끝나고 받은 바지락칼국수는 엄청난 크기의 사발에 한가득 채워주는 4인분 같은 2인분이었다. 엄청난 양인데 미친 가격이다! 단돈 8,000원! 싼데 엄청 맛있다! 바지락도 예의로 넣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푸짐하게 들어 있었다. 이렇게 장사하시다 망하시면 어떡하나 싶을 정도였다. 감사한 마음에 남기지 않고 싶었는데… 둘 다 음식량이 많지 않아서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바지락칼국수 ㅜ ㅜ 목 끝까지 차도록 열심히 먹었지만 결국 일부분은 남겨야 했다.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을 돌아보다
식사 후 창덕궁(昌德宮) 입구에서 조금 대기하다 예약한 타임에 맞춰 입장했다. 불길한 예감처럼 상당히 많은 숫자의 관람객이 예약 타임에 우르르 입장했다. 소규모 그룹이 아닌 완전 대그룹이잖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자유 관람이 불가능해 지금껏 한 번도 가지 않았었는데 기대 반 불길함 반 속에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의 관람을 시작했다.
대한제국의 상징 오얏꽃 문양
확실히 다른 조선시대 궁궐보다 보존이 잘 되어있는 화려하고도 세련된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세계문화유산 창덕궁…하면 자연스레 조선시대 4대 궁궐로 묶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을 떠올린다. 그러나 실제로 방문해 보니 창덕궁은 조선 보다는 대한제국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우선 다른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오얏꽃 문양이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 지붕 용마루를 장식하고 있는 점이다. 오얏꽃이 조선 왕실의 상징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 건국 시 ‘오얏성씨가 왕조를 세우리라’는 그 유명한 예언 때문이다. 오얏꽃의 한자가 [李]라서 이 씨 성씨를 가진 이성계가 조선을 세웠기에 조선 왕실의 상징이 오얏꽃이라 생각되지만 아니다!
조선시대 내내 오얏꽃 문양이 특별 대우를 받은 적이 없다. 문양으로서 사용된 적이 없다는 말이다. 조선에 망조가 들고 일제의 간섭이 심해져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하면서, 대한제국의 상징처럼 오얏꽃을 문장처럼 사용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아마도 일본에서 가문의 문장을 사용하는 것에서 착안하지 않았을까?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여러 개수 공사를 진행하면서 용마루에 대한제국의 문장인 오얏꽃 문양을 새긴 것이다.
혼돈의 20세기 초반의 서양 문물 수용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에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대한제국 시대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외부의 전통적인 궁궐의 모습과는 달리 전각 내부는 서양식 인테리어를 장착하고 있다. 특히 내전 영역인 희정당(熙政堂)과 대조전(大造殿)의 내부는 카펫 바닥에 서양식 가구, 유리창, 전등 등 완벽하게 서양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희정당과 대조전은 각각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이 시대 피라미드의 최상위층에서는 이미 일상생활에 서양 문물을 적극 수용했던 것이다.
조선 전통 건축의 외양과 서양식 인테리어의 조합은 사실 꽤 괜찮은 모습이다. 동서양 문화를 아름다운 하모니를 느낄 수 있지만, 실상은 제국주의 열강에서 힘 못쓰는 상태로 탈출구를 모색하려는 마지막 발악이 담겨있는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약소국의 슬픔… ㅜ ㅜ
창덕궁 한편에 자리 잡은 낙선재
낙선재는 헌종이 1847년에 지은 건물로 왕의 서재 겸 사랑채로 이용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로 원래는 창경궁 소속이었는데 현재는 창덕궁의 일부로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바로 옆으로 이어져 있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대한제국 최후의 황족들을 위해 대한민국 정부가 유일하게 거주를 허가했던 곳이다.
대한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순종의 계후)가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고, 덕혜옹주와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부부도 이곳에서 함께 지내다 삶을 마쳤다. 어릴 적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의 사망 소식을 뉴스에서 접한 기억이 난다.
낙선재(樂善齋)는 조선시대 궁궐의 일반적인 외양이 아닌 사대부 가옥의 형태로 만들어 단청을 칠하지 않아 고즈넉하고 일반인에게 익숙한 느낌의 공간이었다. 그래도 궁궐은 궁궐이라 소박함 속의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일반 사대부 가옥에서는 보기 힘든 정교하고 화려한 창호(wood lattice pattern)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동일한 창호가 거의 없고 패턴이 다 다르다! 돌담도 마찬가지다. 패턴이 다 다르다. 그림처럼 보이는 꽃담도 불에 구운 전돌로 하나하나 짜 맞춘 것이라고…
최대 공임비가 목적이었나?
아쉬운 창덕궁 가이드 투어
자랑스러운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이지만 아쉬운 점은 늘 있기 마련이다. 자유 관람이 아닌 가이드 투어라 소규모 그룹으로 조용하고 집중하며 둘러보는 그런 투어를 생각했다. 현실은 가이드가 핸들링 하기에 너무도 많아 보이는 인원이 한 번에 우르르 이동하며 설명을 듣는 거라 당황스러웠다. 창덕궁 내부의 수많은 여러 그룹들과 동선이 겹치면 서로서로 마이크를 대고 설명하느라 너무 시끄럽고 정신이 없었다.
딱 도떼기시장 같았다. 이렇게 밖에 안 되는 것일까?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가이드 투어는 세계문화유산 수준으로 진행되겠지 기대하면 안 된다. 그냥 무더기로 서로 엉켜서 마이크로 우렁차게 설명하는 수많은 그룹의 가이드의 소리가 겹쳐 아주 시끄럽고 아주 복잡하고 아주 짜증 나는 관람 경험이었다.
가이드 투어 만족도가 너무 낮았기에 창덕궁에서 나와 뭔가 좀 더 만족스러운 것을 찾아 인사동 구경도 하고 운현궁에도 잠시 들렀다. 마침 국악 한마당 행사가 시작되어 가야금, 거문고 연주를 들으며 부족했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외국인들도 많이 방문하는 세계문화유산인 만큼 좀 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방식으로 가이드 투어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화재청 여러분, 개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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